Side. A
1. 사의찬미 (3분3초)
Side. B (공면)
* 가격이 비싸다고 느껴질수 있으나 수작업으로 제작하다보니 이틀에 생산량이 1~2장 정도 입니다.
* 일반 LP플레이에서 재생시 78 RPM 으로 재생 가능함.
* 일반 LP플레이에서 재생시 고가의 바늘을 사용을 자제하세요 (빨리 마모됩니다) 되도록이면 전용 축음기에서 사용하세요
* 본 앨범은 주문제작 상품이라 주문후 취소는 불가합니다.
본 음반에 대하여 :
윤심덕의 <사의 찬미> SP(유성기)음반은 1926년 일본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출반되었다. 그 당시의 인기와 지금의 희귀성으로 인해 현재 음반은 6천만원 이상을 호가하고 있다. 너무 고가라 감히 음반이 훼손될까 누구도 재생을 하지 않는다.
유성기음반은 유성기로 들어야 제 맛이다, 유성기로 듣기 위해 복제품을 영국에서 쪽반으로 제작하였다. 현재 양면 제작은 불가능하다.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음원을 구해 다시 마스터링하여 제작하였는데, 원래 곡은 3절로 4분 40초 정도인데 지금 기술로 4분 이상 담는 것이 불가능하여 부득이 3절은 자르고 2절까지만(3분 3초) 수록하였다.
라벨은 새로 다듬고 가사지도 재현하였다. 음반만 영국에서 제작하고 그 외는 국내에서 만든 것이다.
수작업으로 개인이 제작한 것이라 라벨 등이 아주 조금 사진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사의 찬미> 노래는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 일부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다. 윤심덕 혹은 김우진 작사로 추정되나 확인된 바가 없다. 음반은 일본 레이블(일련번호가 일본음반)로 출반되었으며 여러 번 재발매되어 이(伊)심덕이라고 잘 못 표기된 음반도 있다.
* 음반 <사의 찬미>와 윤심덕 :
1897∼1926. 호는 수선(水仙)이며 평양 출생.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으며, 강원도 원주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서 수업받았다.
1921년 동우회(同友會) 등의 순회극단에 참여하면서 극작가 김우진(金祐鎭)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6월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하였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되었다. 양악이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제대로 성악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 또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정통음악을 가지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사생활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하였다. 한때 극단 토월회 주역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나 연기력이 없어서 실패하였다.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꿈꾸었던 예술 조국을 만들기에는 이 땅이 너무 낙후했고 견고한 유교적인 인습은 그녀를 더욱 못 견디게 하였다.
특히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은 진보적인 도덕관을 지닌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다. 1926년 여동생 윤성덕(尹聖悳)의 유학길 배웅을 위하여 일본에 간 그녀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먼저 와 있던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하였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수의 요절과 유작에 대한 대중들의 폭발적 관심과 반응이 나타난 최초의 사례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일 것이다.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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